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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우드 페스티벌 탐방기

한국에서 가장 빠른 사내가 여름휴가 핑계로 영국 남쪽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비친 굿우드는 단순한 페스티벌을 넘어 살아 숨 쉬는 모터쇼였다

2019.09.06

 

히스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렌터카를 찾아 영국 남쪽에 있는 치체스터로 달렸다. 한국인에게 생소할 수 있는 치체스터는 바로 매년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FOS)가 열리는 곳이다. 막연히 굿우드 페스티벌에 호기심만 갖고 있었는데 이번 여름휴가를 덜컥 이곳으로 정해버렸다. 철없는 남편의 사심이 아니라 아내가 먼저 제안을 했고, 그녀의 꿀 같은 프러포즈를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딸아이는 굿우드 페스티벌을 보러 간다며 빨간 페라리 레이싱 슈트까지 챙겼다.

 

 

아침 일찍 굿우드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 이미 좁은 국도는 차들로 가득하다. 통행이 뜸한 곳이지만 FOS 시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드는 모습이 24시간 내구 레이스가 열리는 시골 마을 뉘르부르크링과 유사하다. 하지만 뉘르부르크링 주변 국도가 고성능차 일색인 걸 고려하면 치체스터 인근에선 슈퍼카부터 초호화 럭셔리카, 클래식카, 한정판 모델까지 다양한 차를 볼 수 있다. 길은 막혀도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다. 굿우드 저택을 둘러싼 언덕 뒤쪽 풀밭 수만 평이 초대형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주차장부터 굿우드 행사장까지는 지름 2m짜리 바퀴가 달린 농업용 트랙터가 끌고 가는 간이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이동한다. 영국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나면서도 바퀴 달린 탈것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만하다. 이런 모험을 견딜 수 없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 어린이와 함께 온 가족을 위한 VIP 셔틀은 레인지로버가 담당한다. 아직 티켓 박스를 통과하지도 않았는데 흥에 취한다.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입장권은 당일 구매가 불가하다. 적어도 하루 전에 예약을 마쳐야 한다. 그마저도 서두르지 않으면 금방 매진된다. 해당 홈페이지에서 미리 지도를 꼭 살펴보길 권한다. 야전에 세워진 대형 행사장이기 때문에 대략이라도 길을 익혀두는 게 찾아다니기가 편하다. FOS는 힐 클라임 코스라 불리는 1.86km짜리 도로를 따라 좌우로 다양한 공간이 들어선다. 주차장도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접근하는 게이트가 어디이며 어떤 동선으로 둘러볼지 살피지 않으면 생각보다 긴 거리를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우리 가족 역시 효율적인 동선으로 돌아다닌다고 했지만 10km 가까이 걸은 듯하다.

 

 

티켓 검표를 마치고 들어서자마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다양한 경주차가 텐트 안에서 주행을 준비하고 있는 패독이 나타난다. 그렇고 그런 경주차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이싱 영웅들이다. 흔한 레이스 패독이나 모터쇼 전시장과 달리 관람객과 차들을 가로막는 장벽도 없다. 누구나 경주차에 다가가 차 주변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오너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저편에 메르세데스 벤츠 C11이 납작 웅크리고 있고 왼쪽에는 페라리 166MM이 잠자고 있으며 등 뒤로는 포르쉐 917이 시동을 걸고 있다. 평생 한 대 보기도 어렵다는 917이 손님 기다리는 택시처럼 8대나 줄지어 서 있다. 르망, 밀레밀리아, 타르가 플로리오, 뉘르부르크링 등 역사적 순간을 장식한 주인공들이 동창회를 하듯 모여 있다. F1 경주차가 모여 있는 패독이 그나마 평범한 축에 들 정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나의 시신경에 과부하가 걸린다. 탄성이 수십 번 튀어나오자 끝내 현기증이 온다. 아노미에 가깝다. 현존하지 않는 유니콘을 직접 보았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림이나 사진 속에서만 보던 자동차들이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발걸음을 옮기자 랠리카, 투어링카, 모터사이클도 카테고리별로 모여 있다. 일정표에 따라 이곳 패독에 있는 거의 모든 차가 힐 클라임 코스를 직접 달린다. 그냥 멈춰 서서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차들이 내는 냄새와 진동, 엔진 회전수에 따라 연주하는 소리, 그리고 그 차를 조작하는 드라이버까지 코앞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FOS다.

 

 

위대한 경주차들이 전부는 아니다. 자동차업계와 모터스포츠의 거장들도 쉽게 눈에 띈다. 제조사들이 꾸민 부스도 모터쇼 규모 이상으로 들어서 있다. 대중부터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범위도 다양하다. 랜드로버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디펜더를, 포르쉐는 타이칸을 공개했다. 물론 디펜더는 위장막을 씌우고 타이칸은 어두운 컨테이너 안에 넣고 작은 창문으로만 들여다볼 수 있어 애간장을 태웠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차의 실물을 대중 앞에 선물처럼 내놓는 마케팅을 통해 굿우드 페스티벌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엿볼 수 있다. 삼성은 5G 기술을 활용해 프로 드라이버가 외부에서 온보드 카메라 영상에 의존해 드리프트 시연을 벌이는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펼쳤다.

 

 

유럽 부호들의 지갑을 열기 쉬운 자리인 만큼 슈퍼카 브랜드들의 구애 작전이 유독 눈에 띈다. 자동차라기보다 타이어 달린 보석 같은 느낌인데 토마스 P72나 브라밤 BT62 같은 모델은 국내에선 평생 만날 일 없는 귀한 존재다. 아우디는 R8 GT2를 공개했고 맥라렌은 신형 GT를 내놓고 페라리는 P80/C와 몬자 SP2를 사람들 틈에 세워뒀으며 911 RSR GTE 신형과 935 모비딕도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채웠다. 얼마 전 <모터트렌드>에서 인생 단 한 대의 차로 소개한 싱어 911 DLS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힐 클라임 코스를 전력 질주하는 DLS를 바라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출시 자료나 유튜브에서도 확인을 못했는데 생각보다 고회전 공랭식 엔진의 소리가 얌전했기 때문이다. 아내마저 소리에 갸우뚱하기에 “FOS에 오지 않았다면 저 밋밋한 소리를 내는 차가 드림카가 될 뻔했네. 이것만으로도 본전 뽑았다”며 서로 한바탕 웃었다.

 

 

제조사별 부스 안의 전시차들도 시간이 되면 무대를 빠져나와 트랙을 한 번 달리고 돌아오는 점도 재미있다. 도둑맞은 것처럼 부스 무대 위에 주인공이 없을 땐 ‘한바탕 달리러 나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잠시만 기다리면 뜨근뜨근한 타이어를 굴리며 돌아와 다시 마네킹처럼 포즈를 취하는 자동차들이 재미있다. 격식을 갖추고 싶은 사람들은 라운지에서 와인과 함께, 편하게 둘러보고 싶은 이들은 잔디 위에 드러누워 자유롭게 차들을 바라본다.

 

 

굿우드 페스티벌은 살아 있는 모터쇼다. 몇 대 없는 슈퍼카부터 차고에 고이 세워두기만 해도 아까울 역사적 모델들이 모든 출력을 쏟아내며 아름답게 달린다. <모터트렌드> 독자라면 당장 이곳을 여행 리스트에 추가해도 좋다. 여긴 자동차 애호가에게 허락된 천국이니까.글_강병휘(자동차 칼럼니스트 겸 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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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김선관PHOTO :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강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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