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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수동의 기억

복고와 아날로그에 열광하는 디지털 시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수동변속기는 유행하게 될까? 어쩌면 올지도 모를 그날을 기약하며, 수동변속기에 관한 기억을 각자 꺼내봤다

2020.03.24

 

기자는 수동 운전을 못해도 될까?

4년 전, 대여섯 명의 기자가 볼보 S90 시승을 위해 스웨덴 본사에 갔을 때다. 볼보는 동양에서 온 기자들에게 그들의 역사적인 모델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아마존, P1800, 164를 테스트 트랙에 가져다 두고는 마음껏 타라는 선심을 베풀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누구도 이 아름다운 차에 오르지 않았다. 수동변속기 운전을 못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볼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 석 대를 번갈아 타며 신나게 달렸다. 전자장비가 전혀 없는 차의 뻑뻑한 4단 기어를 넣고 빼면서 기어 변속에 따른 그립의 변화를 생생히 체감했다. 10여 년간 자동차 전문기자를 하면서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로 기억된다. “기자님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1시간 내내 트랙을 질주한 내게 볼보 코리아 담당자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갑자기 왜요?” “수동 운전을 아무도 못했다면 본사 담당자들한테 창피할 뻔했잖아요.” 당시 내가 만약 수동 운전을 못했다면 P1800은 영원히 몰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나 수동 못해. 자동으로 줘.” 지난 2018년 5월, 현대 벨로스터 N 출시 및 미디어 시승기에서 어느 기자가 현대차 직원에게 한 말이다. 그 기자는 그 말 한마디로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에게 ‘과연 이 사람이 기자가 맞나?’ 싶은 생각을 들게 했다. 우선 현대 벨로스터 N은 자동변속기 모델이 없다. 그리고 그 기자는 벨로스터 N이 수동만 출시된다는 것도 모르고 시승회에 왔다. 그런데 수동변속기를 운전하지 못하는 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현대차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행사는 ‘이게 자동차 시승행사인가’ 싶었다. 시동을 꺼먹는 건 예사고, 클러치 조작이 서툴러 울컥거리는 차가 부지기수였다. 같은 기자로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시동을 꺼트리며 제대로 달리지 못했는데도 그날 인터넷에서 그의 시승기를 봤다. 정말 대단한(?) 기자다.

글_이진우

 

2단과 후진, 생과 사의 기로

자동차 운전면허를 처음 딴 게 2000년이다. 그때도 수동변속기보다는 자동변속기를 훨씬 선호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방학마다 건설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동변속기가 들어간 화물차를 많이 몰았다. 1톤부터 3.5톤까지 다양하게 몰았기에 큰 차 운전도 익숙했고 수동변속기도 능숙하게 다뤘다.

 

덕분에 운전병으로 입대한 군대에서도 적응이 빨랐다. 2002년에 입대했는데 그때까지 우리 부대에는 자동변속기를 쓰는 차가 딱 한 대뿐이었다. 사단장의 관용 세단. 그걸 제외한 모든 차에 수동변속기가 들어갔다. 나는 부대에서 장거리 운행용 소형세단과 다용도로 사용하던 12인승 승합차를 주로 몰았다. 그리고 주말에는 25인승 중형버스를 운전했다. 이 버스로 일요일마다 열리는 종교 행사에 병사들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 버스의 수동변속기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고장이 있었다. 모든 단을 운전자가 직접 찾아서 넣어야 했다. 말하자면 수동변속기 레버는 기어를 넣지 않았을 때 중립 위치인 가운데 자리하는데, 그 버스의 변속기 레버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레버를 중앙에 위치시키고, 좌우로 레버를 움직일 때 감각적인 신호를 주는 스프링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진 기어를 맨 왼쪽으로 당겨 위로 밀어 넣는 방식이었는데, 가끔 2단 대신 후진을 넣을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물론 레버가 바닥에서 기다랗게 올라온 방식이라 각 단 사이 거리가 꽤 길게 느껴졌고, 2단은 가운데에서 위로 바로 올려 넣으면 됐기 때문에 실수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던 시기라 솔직히 운전에 집중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고 졸면서 운전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종종 불안에 시달렸다.

 

한번은 부대 사정상 동승자 없이 늦은 밤에 25인승 버스를 몰고 전방의 한 부대로 향한 적이 있었다. 당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빡 졸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나도 모르게 변속을 했다. 3단에서 2단으로! 바로 그 옆이 후진기어였다. 그때 만일 후진으로 변속했더라면….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글_고정식

 

 

수동은 가족력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염세와 냉소가 기본값인 나와는 달리, 엄마는 ‘천생 소녀’ 같은 사람이다. 엄마의 치맛바람이 그나마 효력이 있던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 방엔 동물 커튼과 눕히면 눈 감고 앉히면 눈 뜨는, 섬뜩한 아기 인형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내게로 수혈된 것은 다행스럽게(?) 취향이나 살뜰함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은 무릇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이 가질 만한 당연한 자존감, 그리고 ‘수동’이었다.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동차 운전학원에 나를 등록시켰다. 수강증에 또렷이 찍힌 1종 보통면허. 그것이 노란 승용차에 탈 일이 없단 뜻임은 가서야 알았다. 가속페달을 누르는 힘의 세기를 익히기 전에 내 발에 닿은 것은 달달거리는 클러치의 진동이었다. 하루 종일 쿨럭거리는 클러치를 상대하느라 무릎이 저릿했고 가속을 즐길 새 없이 무거운 스틱 기어를 옮겨야 했다. 집에 오면 진이 다 빠졌다. 상냥한 승용차가 아닌, 왜 꼬장꼬장한 1톤 트럭을 붙여줘야만 했는지가 야속해 어느 날은 까닭을 물었다. “너 방학 때 내려오면 어린이집 통원차 운전 좀 맡기려고~.” 엄마는 어린이집 기사에게 종종 휴가를 주고 직접 통원차를 몰았다. 소녀 같은 엄마가 스틱을 ‘갈 지之’ 자로 ‘파워 조작’할 때면 내가 봐도 좀 멋있긴 하다. 동생도 같은 이유로 성인이 되자마자 1종 면허를 땄고 그렇게 우리 가족 4명은 모두 1종 면허 보유자가 됐다. 원생의 안전상 이유로 나나 동생에게 봉고차 운전대를 맡긴 적은 없지만, 엄마의 무심한 선택은 10년 뒤 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는 이력서에 적힌 ‘1종 보통면허’가 <모터트렌드> 입사에 유효타였다 믿는다.) 대체로 잠재된 날이 많지만 내 혈관에는 수동의 피가 울끈불끈 흐른다. 요즘은 무슨 차를 살지 고민하는 나를 향해 선배들이 한 말이 맴돌아 큰일이다. “수동 모는 여자가 그렇게 쿨할 수 없지.”

글_장은지

 

벌써 9년

벤틀리 컨티넨탈 GT 쿠페를 시승하고 돌아온 저녁이었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면서 그 어마어마한 힘과 극상의 고급함, 악동 같은 성격을 고루 느낀 후였다. 몸에는 경미한 흥분과 피로가 썩 괜찮은 비율로 섞여 있었다. 저녁엔 다른 약속이 있었다. 주차장에는 내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2011년형 수동기어 스파크를 타고 있었다. <GQ> 자동차 담당 기자로 몇 년인가 일했을 무렵, ‘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모델에 익숙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수동 경차야말로 기계적으로 소박하고 직관적인 장르니까. 차에 오르자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스티어링휠에는 열선이 없었고, 단계를 조절할 수 없는 운전석 열선은 아주 천천히 따뜻해지다가 지나치게 뜨거워지곤 했다. 공간 자체가 좀 서러운 느낌이랄까.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하지만 시동을 걸고 1단 기어에 결속하는 순간 마음이 푹 놓였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2단으로 변속했을 땐 그 솔직하고 기계적인 느낌이 듬직했다. 히터는 더운 바람을 부지런히 뿜고 있었다. 그 무렵 즐겨 듣던 CD 플레이어에서 익숙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품이 참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충직한 느낌이 너무 귀엽고 좋아서 그때, 나는 모든 긴장을 풀고 혼자 웃었을까. 세상엔 벤틀리처럼 호사스러운 안락도, 내 수동기어 스파크처럼 꾸민 데 없는 편안함도 있는 법이니까. 물론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늦은 밤엔 고약한 상황을 만나기도 했다. 괜한 추월, 경차를 향한 그 밑도 끝도 없는 공격성 같은 것들. 대부분은 담담하게 넘겼지만 가끔은 본때를 보여주기도 했다. 몇 번의 다운시프트. 3단에서 시속 80km 언저리까지 가속하다 4단, 5단까지 호쾌하게 달릴 땐 세상 꿀릴 게 없었다.

 

벌써 9년째다. 평소에는 스쿠터를 주로 타니까, 총 주행거리는 3만3000km 정도밖에 안 됐다. 그래서 여전히 말쑥하고 귀여운 표정으로, 내 수동기어 스파크는 오늘도 주차장에서 외출을 기다리고 있다. 2011년 초겨울의 그 짱짱하고 솔직한 성격 그대로, 언제든 최선을 다해 달릴 준비를 하고.

글_정우성(자동차 칼럼니스트)

 

 

수동변속기를 선택한 이유

“너 수동변속기 할 줄 알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질문을 하지 않는 편집장이 물었다. 내 면허증 왼쪽 위에 검은색 잉크로 짙게 써 있는 글씨, 1종 보통. 하지만 수동변속기 기어레버를 잡아본 건 운전면허 시험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수동변속기에 대해 물어본 건 현대 벨로스터 N 시승회에서 겪었던 웃지 못할 일 때문이었다. 벨로스터 N이 수동변속기인 줄도 모르고 온 기자도 몇몇 있었으며, 시승에선 시동을 꺼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수동변속기도 조작할 줄 모르면서 전문지 기자라고 할 수 있나?” 편집장이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가슴속이 일렁였다.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못하는 것도 없는 건 내 오랜 자랑거리였다. 수동변속기는 나의 자존심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 연고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음 날 수동변속기가 달린 차를 구매했다.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이 선택이 언젠가 빛을 볼 것으로 확신하고 2년 동안 지옥 같은 출퇴근을 함께했다. 얼마 전, <모터트렌드>에 모 브랜드 출장 건이 들어왔다. 홍보 담당자는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출장은 수동변속기를 조작할 수 있는 기자여야 한다”며 그런 기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편집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선관 기자 알지? 얘 차가 수동이야. 가서도 운전 잘할 거야.”

글_김선관

 

 

 

 

모터트렌드, 자동차, 수동변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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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장은지PHOTO : 최신엽(일러스트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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