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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8 랜드의 화끈한 SUV들

고효율과 친환경이 덕목인 요즘, 풍요의 상징과도 같은 V8 SUV를 끌고 도로 위를 달렸다. 넘쳐흐르는 주행의 즐거움에 사람들의 눈치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2020.12.20

(왼쪽부터)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 재규어 F 페이스 SVR, 폭스바겐 투아렉 4.0 TDI, 포르쉐 카이엔 쿠페 터보

 

 

포르쉐 카이엔 터보 쿠페

V8 엔진과 SUV. 둘 모두 여유를 상징하는 키워드다. V8 엔진을 얹은 SUV라고 하면 응당 커다란 차체와 막대한 토크, 그리고 특유의 사운드를 가진 마초 성향의 차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 모인 차 중 일부는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카이엔 터보 쿠페 역시 마찬가지. 포르쉐답게 한 치의 흠 없는 스포츠카를 지향하고 있다.

 

 

스포츠카가 주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다. 조작과 반응 사이에서 비롯된 희열, 엄청난 속도, 스릴과 몰입감이 대표적이다. 솔직히 카이엔 터보 쿠페는 운전 재미가 그렇게 자극적인 차는 아니다. 나윤석 칼럼니스트가 카이엔 터보 쿠페에서 내리며 무심하게 던진 말이 이를 잘 설명한다. “하, 거참 비현실적인 차야. 지가 다 알아서 하잖아.” 카이맨이나 박스터 같은, 한결 순수한 스포츠카처럼 쥐고 흔드는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마 포르쉐는 카이엔, 그러니까 크고 무거운 대형 SUV를 진짜 스포츠카로 만들기 위해 조작이 주는 미묘한 재미를 양보했을 것이다. 여느 대형 스포츠카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속도와 몰입도 측면에서는 카이엔 터보 쿠페와 비교할 SUV가 없다. 어찌나 빠른지, 와인딩 로드에선 가속과 브레이크 페달, 그리고 운전대를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SUV에서 상상도 못한 엄청난 횡가속도를 경험했을 땐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내가 이처럼 무아지경에 빠져 폭 315mm짜리 리어 타이어의 한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건, 운전대를 잡은 손과 시트에 밀착한 허리를 통해 전달되는 무한한 신뢰 덕분이다. 카이엔 터보 쿠페는 어떤 속도, 어떤 자세에서도 지독하리만치 일정한 반응을 보였다.

 

 

포르쉐가 무서운 건 이런 신뢰를 가변 기술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엄청난 용량의 3 체임버 에어 서스펜션과 롤 강성을 수시로 바꾸는 48볼트 가변 스태빌라이저(PDCC), 그리고 이들을 관장하는 4D 섀시 컨트롤이다. 카이엔 쿠페 터보는 위아래, 좌우, 앞뒤 등 차체의 이동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무게 변화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쇄한다. 웬만한 고급 승용차 아쉽지 않을 만큼 차분한 승차감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리법칙을 벗어난 느낌’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모습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포르쉐는 확신이 없으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지 않는 브랜드라는 점이다.

 

 

물론, 카이엔 터보 쿠페는 기계적인 완성도도 완벽에 가깝다. 가령 무게 2230kg인 대형 SUV라는 사실이 전혀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앞뒤 무게 배분이 고르다. 과장 좀 보태 미드십 스포츠카를 타는 듯한 느낌이다. 내리막 코너에서조차 엔진 무게가 의식되지 않을 정도. 덕분에 굳이 패들시프트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 포르쉐에서 만든 차 아니랄까 봐, 스티어링 감각도 날이 바짝 서 있다. 손끝 움직임에 따라 차체 앞머리가 정교하게 돌아간다. 최대 3°까지 뒷바퀴를 비트는 리어 스티어링은 골목길에서 카이엔이 소형 SUV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토크벡터링 플러스는 드라이브 모드에 따라 턴인 감각까지 자유자재로 바꿨다. 이처럼 카이엔 터보 쿠페는 어떤 SUV보다 빠른 속도로 우월감을 주기도 하지만 천천히 달릴 때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의 기계적 완성도로 희열을 안기기도 한다.

 

 

엔진이나 변속기도 흠잡을 곳이 없다. 하지만 엔진 및 배기 사운드는 예상외로 조용하다. 함께 시승에 나선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나 재규어 F 페이스 SVR은 물론, 이전 세대 카이엔 터보보다도 훨씬 얌전하다. 여러모로 내연기관 스포츠카와 전기 스포츠카가 공존하는 시대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절제한 느낌이다. 한 지붕 식구인 람보르기니 우루스와 같은 고수익 내연기관 모델도 의식해야 했을 테고. 물론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 두고 엔진의 회전 한계를 넘나들며 달릴 때는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스포츠카의 정의는 그동안 계속 변해왔다. 차체의 경우 2도어 쿠페에서 세단을 거쳐 이제 SUV까지 확장됐다. 포르쉐는 그간 이런 변화에 아주 보수적이면서도 과감하게 대응해왔다. 동시에 기술 혁신을 통해 완성도도 끊임없이 높였다. 예컨대, 포르쉐가 이번 세대 파나메라와 카이엔을 통해 보여준 섀시 컨트롤은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카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엔진은 어떨까? 포르쉐가 카이엔 터보 쿠페에 V8 엔진을 얹은 건 과잉이나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다운사이징에서 전동화로 넘어가는 현 상황에서, 카이엔을 진지한 스포츠카로 만들기에 이만큼 적합한 파워트레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 카이엔은 엔진이 아닌 섀시가 완벽하게 주도하는 세팅이다. 여러모로 내연기관 엔진의 종말을 알리는 것 같은 느낌의 설정이다(섀시 신기술은 전기차 시대에도 유용하다). 그래도 포르쉐는 카이엔 터보 쿠페를 통해 내연기관 스포츠카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최대치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이산화탄소를 쏟아내는 차냐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별 수 없다. 인류에게 카이엔 터보 쿠페와 같은 느낌을 주는 차는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글_류민(자동차 칼럼니스트)6

 

 


 

 

재규어 F 페이스 SVR

합법이란 기준에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광적인 일이 무엇일까? 나는 500마력짜리 SUV를 타고 굽이치는 산길을 전력으로 달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넘치는 엔진 출력, 포탄처럼 육중한 몸무게가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넘는 타이어 그립에 의지해 운전자와 춤을 춘다. 단언컨대 이런 고성능 SUV를 만든 개발자들은 어딘가 잘못됐다. 만화 속 악당 과학자처럼 사악하고, 집착적이며,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물리법칙에 반항하는 이런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

 

 

재규어 F 페이스 SVR는 한눈에도 평범하지 않다. 밝은 파란색의 차체, 커다란 브레이크 캘리퍼, 웅장하게 뻗어 나온 네 개의 리어 머플러와 빨간색 스포츠 버킷 시트까지. 스포츠카를 따라 한 디자인이 아니라, 스포츠카 그 자체다. SUV에 3점식 레이싱 벨트를 장착할 수 있는 구멍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가속도 미터와 랩타임 모드, 브레이크 그래프는 왜 장착했을까? 모든 의문은 논리적으로 답을 찾을 수 없다. 시동을 걸고 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때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계기반 가운데 커다란 태코미터 색깔이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다. 다이내믹 모드가 활성화됐다는 의미. 이때 차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진다. 저속에서 걸걸했던 배기음이, 속도에 따라 마치 천둥 치듯 커진다. 위협적이다. 재규어 담당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주변을 위협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 차의 배기음은 그만큼 난폭하다. 다른 차를 앞질러 갈 때 추월당한 차를 향해 ‘저리 꺼져!’라며 호통치는 듯하니까.

 

 

F 페이스 SVR은 V8 5.0ℓ 슈퍼차저 엔진을 단다. 보통 슈퍼차저 엔진은 풀리가 부스트 과급을 시작할 때 ‘엥~’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차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엔진과 배기음 소리가 너무 커서 풀리 소리가 파묻힌다. 두리번거리지 마라. 터널 안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은 다른 스포츠카의 것이 아니다.

 

V8 5.0ℓ 슈퍼차저 엔진의 최고출력은 550마력, 최대토크는 69.4kg·m다. 재규어 랜드로버 스페셜 비이클 오퍼레이션스(SVO) 팀의 작품이다. 엔진과 과급 장비가 얼마나 큰지 엔진 룸이 꽉 채웠다. 보닛을 정상적으로 닫기 위해서 엔진 커버를 삭제했을 정도다. 보닛에 두 개의 에어벤트를 마련한 것도 특징이다. 엔진 열을 밖으로 빠지도록 설계했다.

 

 

F 페이스 SVR의 무게는 대략 2200kg이다. 그런데 가속페달은 깃털처럼 가볍고, 차의 움직임은 물리법칙을 약간 무시하려 든다. 가속력은 초반부터 고속까지 펀치력이 확실하다. 공식  기록에는 0→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4.3초. 최고속도는 시속 283km다. 한마디로 계기반을 보면서 운전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할 만큼 빠르다.

 

반면 변속기의 반응은 차분하다. 난폭한 엔진을 달래며 반박자 부드럽게 동력 계통으로 출력을 이어 붙인다. 그래서 변속기는 아무리 거칠게 다뤄도 타이어 접지 특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차는 정제되지 않는 ‘날 것’처럼 움직인다.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운전자에게 가감 없이 모든 정보를 전달하기에 더 즐겁다. F 페이스 SVR은 예상대로 민첩한 핸들링과 유연한 코너 돌파 능력을 보여줬다. 아무리 전자제어 장비가 개입해도 몸을 사리며 타협하지 않는다. 일단 밀고 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속도를 높일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코너를 향한 움직임이 일반적인 SUV의 그것과 다르다. 이 덩치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라인을 따라 달린다. 네 바퀴의 움직임이 거칠어 보이지만, 코너에서 각 바퀴로 동력이 분배하는 똑똑함을 가졌다. 그래서 운전자를 서서히 부추긴다.

 

 

그러다가 한 번 일이 터진다. 모든 타이어가 접지력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다다른다. 시간이 느려지면서, F 페이스가 시퍼런 송곳니를 드러낸다. 하지만 여전히 기회가 있다. 서스펜션이 움츠러들며 타이어 접지력을 회복시키는 동안 전자제어 장비가 최후의 결정으로 도움을 준다. 그리고 운전자의 카운터 스티어링과 함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네 바퀴가 다시 궤도에 오른다. 이 차는 모든 움직임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자신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경고도, 본격적인 스포츠카처럼 똑 부러지게 한다.

 

머리가 멍하다. 커다란 덩치로 보여주는 이율배반적인 움직임에 감탄이 나올 뿐이다. 동시에 내 경험치가 확장된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만족감이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을 논리적으로 변환해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는 없다. 그게 이런 SUV가 V8 5.0ℓ 슈퍼차저 엔진을 얹은 이유, F 페이스 SVR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글_김태영(자동차 칼럼니스트)

 

 


 

 

폭스바겐 투아렉 4.0 TDI

벌써 14년 전이다. 남산서울타워 루프테라스에 크레인으로 차를 올렸다. 행사가 끝난 뒤 다시 차를 아래로 내렸다.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바로 그 차에 시동을 걸고 그대로 남산 둘레를 달렸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충족감이었다.

 

 

그때 탔던 차는 투아렉 V10 TDI, 10기통 터보 디젤 엔진을 가진 괴물 SUV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가인 1억2700만원이었던 국내 도입 사양은 인디비주얼 아이템으로 화려한 옵션이 가득했지만 본질은 5000cc짜리 심장이었다. 나중에 선보인 투아렉 R50은 최고출력 350마력, 최대토크 86.7kg·m로 더 강해졌다. R50도 딱 두 대만 공식 수입했다. 바로 내 손으로 직접 투아렉 V10 TDI를 국내에 가져온 것은 폭스바겐 재직 시절에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그리고 그 후손이 지금 내 곁에 있다. 세대를 두 번 거치며 실린더 두 개와 1ℓ의 배기량이 줄어 V8 4.0ℓ가 됐지만 성능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최고출력 421마력으로 1리터당 100마력을 뽑아내는 디젤 엔진이라는 점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91.8kg·m라는 최대토크다. 비록 공차중량이 2.5톤에 가까운 거함이지만 이 정도 토크라면 10만 톤짜리 항공모함을 드리프트시키는 원자력 엔진처럼 무시무시한 가속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V8 디젤 엔진을 얹은 투아렉이 ‘길티 플레저’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한때 디젤은 세상을 구하는 친환경 기술이었다. 가솔린보다 힘도 좋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적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변했다. 다운사이징 터보 엔진에 앞장섰던 것도 폭스바겐이고, 디젤 엔진에 안녕을 고하게끔 만든 것도 폭스바겐이다.

 

차를 둘러보면 외모나 실내에서 엄청난 엔진을 품은 친구라는 인상을 별로 느낄 수가 없다. 21인치 검정색 알로이 휠은 R 라인에 따라온 것이지 엔진과는 상관이 없다. 나이트비전 같은, 국내에서는 V8 TDI에만 적용되는 사양들도 있지만 V8 TDI 전용 사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두운 밤길 위를 춤추듯 비추는 현란한 IQ 라이트와 LED 매트릭스 헤드램프 등 옵션은 풍성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줄 뿐 이 투아렉이 어떤 식으로 특별한지를 말해주지는 못한다.

 

 

외모는 간결한 요즘 폭스바겐 디자인 언어를 그대로 따른다.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을 가로지르는 수평으로 단정한 얼굴이 그렇고 간결하게 차체의 옆면을 따라 흐르는 캐릭터 라인이 그렇다. 단지 라디에이터 그릴이 범퍼 아래로 높이가 넓어진 것, 그리고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15인치의 대형 인포테인먼트 스크린을 감싼 대시보드의 수평 라인이 투아렉이 여느 폭스바겐 모델보다 상위 클래스임을 보여주는 차별점일 뿐이다. 티구안의 형처럼 느껴지는 것도 디자인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 폭스바겐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V8 TDI를 느낄 수가 없다.

 

 

결국은 직접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야수의 본능을 몸으로 느낄 때가 더욱 짜릿할까? 시동을 걸면 ‘우우~’ 하고 얌전한 소리가 들려온다. 맹렬하게 팀파니를 두들기는 듯한 웅장한 배기음도, 거칠게 숨 쉬는 야수와 닮은 흡기음도 없다. 은은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울려 퍼질 뿐이다.

 

주행 감각에서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물론 21인치 초광폭, 저편평 타이어가 노면의 요철을 불필요하게 밟는다는 느낌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에어 서스펜션이 큼지막한 노면의 요철을 집어삼키는 주행 질감은 예상을 뛰어넘는 고급스러움이었다. 그러면서도 운전대를 돌리면 앞바퀴의 접지력이 놀랄 정도로 좋아 투아렉의 앞머리가 명료하게 회전한다. 커다란 디젤 엔진을 앞머리에 실은 2500kg짜리 거대한 차의 앞부분이 이렇게 움직이는 건 반칙이다.

 

 

달리는 모든 과정이 풍요롭고 여유롭다. 2.5톤짜리가 새털처럼 가볍게 가속한다. 가솔린 엔진처럼 매끄럽다. 비유적 표현도 아니고 ‘디젤 엔진치고는’이라는 조건을 붙일 필요도 없다. 엄청난 토크에서 기대했던 내 몸을 등받이에 파묻어버리는 강렬한 가속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르막길을 주행하든, 사람과 짐을 가득 태웠든, 언제 어디서나 아주 가볍고 풍성하게 가속한다 0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4.9초가 자극적이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투아렉을 보고 깨달았다. 3세대 투아렉 4.0 TDI에서는 1세대의 기함이 보여주었던 디젤 엔진의 폭력적인 힘을 굳이 다시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페이톤이 없는 지금의 폭스바겐에서 기함 역할을 해야 하는 투아렉은 풍성하고 여유롭게 힘을 쏟아내며 럭셔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글_나윤석(자동차 칼럼니스트)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

SUV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내세운다. 사람을 많이 태우거나 짐을 가득 실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과 차체가 낮은 세단은 갈 수 없는 비포장도로를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는 주행 등이 SUV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음의 SUV는 캠핑 같은 액티비티 활동을 위한 이동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조금은 불편했던 승차감이 세단만큼 편안해졌고, 투박했던 디자인 역시 개선돼 굳이 액티비티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SUV를 찾았다. 지금은 세단이 구축하고 있었던 패밀리카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SUV에 다른 모습을 원했다. 고급 세단처럼 화려하고 비싼 SUV를 요구하거나 잘 달리고 날렵하게 생긴 SUV를 꿈꿨다. 브랜드 역시 이러한 SUV를 만들어내면 많은 수익을 창출하니 마다하지 않았다. 마세라티도 그런 브랜드 중 하나였다.

 

 

줄곧 스포츠카와 스포츠 세단을 만들어온 마세라티가 자신들의 첫 SUV 르반떼를 가지고 고성능 프리미엄 SUV 시장에 뛰어든 건 2016년이다. 시장에 내놓자마자 반응은 대단했다. 잘생긴 외관에 화끈한 성능, 오프로드를 달릴 수 있는 마세라티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세라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엔진 다운사이징의 흐름을 역행이라도 하는 듯 2018년 GTS, 2019년 르반떼 모델 중 가장 강력한 트로페오를 선보이며 고성능 SUV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GTS와 트로페오의 무기라고 하면 단연 보닛 아래 들어간 엔진이다. 이전에 선보였던 르반떼 모델들엔 V6 가솔린 엔진과 V6 디젤 엔진이 들어갔다. 하지만 GTS와 트로페오에는 페라리에서 만든 V8 3.8ℓ 트윈터보 엔진이 얹힌다. GTS와 트로페오는 엔진 세팅값이 조금 달라 출력이 조금 차이가 난다.

 

 

시승차인 트로페오의 보닛을 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빨간색 엔진에 탄소섬유가 씌어 있다. 페라리에서 가져온 V8 엔진이다. 이 엔진은 최고출력 590마력, 최대토크 74.8kg·m를 발휘한다. 550마력, 74.7kg·m를 내는 GTS도 어디에서 절대 꿇리지 않는 성능이지만 ‘길티 플레저’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GTS보다 트로페오다. 강력한 엔진 덕분에 성능과 관련된 숫자는 화려하다. 0→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9초, 최고속도는 시속 304km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마세라티 모델 중 가장 빠른 속도다. 마세라티의 고성능 쿠페 그란투리스모의 0→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4.7초와 비교하면 트로페오가 얼마나 빠른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트로페오는 속도와 반응, 움직임 등에서 ‘과유불급’의 미덕을 전혀 알지 못한다. 몸으로 느껴지는 가속력은 수치 그 이상이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몸이 시트에 파묻히다 못해 박혀버리게 한다. 시트와 몸 사이에 1mm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앞에선 두 개의 과급기에서 공기 빨아들이는 소리가, 뒤에선 앙칼진 배기음이 청각을 자극해 운전자의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도로 위에서 트로페오는 재빠른 맹수처럼 움직이는데, SUV를 갖고 이렇게까지 사납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트로페오의 한계를 마주하기 위해선 엄청난 담력이 필요할 것 같다. 게다가 일반 도로에서 트로페오의 힘을 모두 꺼내 쓰는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다.

 

 

그래서 마세라티는 트로페오를 트랙에서 즐기기 위한 주행 모드에 코르사(레이스) 주행을 추가했다. 100년이 넘는 레이싱 역사를 가진 브랜드다운 기능이지만 SUV라는 장르에는 조금 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트로페오는 뭐든 넘쳐흘러야만 직성이 풀린다. 트로페오에게 트랙은 SUV의 금기 지역이 아니라 또 다른 놀이터다(그러고 보면 트로페오는 어디든 달릴 수 있다. 온로드든 오프로드든 트랙이든). 코르사 모드로 바꾸면 ‘ESP OFF’ 아이콘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에어 서스펜션이 가장 아래인 35mm까지 내려가고 댐퍼를 단단하게 한다. 배기음은 한층 더 으르렁거리며 변속 타이밍도 최대한 늦춘다. 스포츠카와 비교하면 서스펜션이 무르고 롤링도 심한 편이지만 보통 SUV와 비교하면 트로페오가 스포츠카다.

 

 

르반떼 트로페오는 한자리에 모인 넉 대의 차 중에서 가격(2억2700만원), 최고속도(시속 304km), 이산화탄소 배출량(298g/km) 등을 따져봤을 때 가장 죄악스러운 차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공기를 빨아들여 기름을 태우고 배기가스를 펑펑 쏟아낼수록 쾌감은 가장 자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쾌감을 느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세라티는 자신들의 첫 전동화 모델인 기블리 하이브리드를 내년에 선보인다. 이후 모든 라인업에 하이브리드 및 순수 전기차를 추가할 계획이다. 그러니까 마세라티 라인업에서 V8 엔진이 자취를 감출 날이 곧 다가온다는 말이다. 고효율과 친환경이 당연한 덕목인 지금의 시대가 가혹하게 느껴지는 건 오직 나뿐만은 아닐 거다.

글_김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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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김선관PHOTO : 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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